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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상은 무조건 선한 것이 좋다. 개인의 취향.
내 인상은 내 취향에 맞도록 형성되었는지, 아니면 내 취향이 내 인상을 쫓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인상은 선한 편이다. 선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상이 선한 것이 아니라면,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그토록 편하게 나를 놀릴 수는 없었을 거다. 요즘 별 이유로 다 놀림을 받고 있는데, 이제는 내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놀림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음, 내가 이렇게 만인의 호구인 이유는 다 내 인상이 선한 탓이다. 그냥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 이 사람 되게 편할 것 같아!' 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종종 있다. 좋게 이야기하면 그렇고, 그냥 보통 사람의 시점에서 생각했을 때, '아, 이 사람 되게 만만해보여!' 라고 생각되는 사람. 정말 슬픈 일이지만, 아무래도 내가 그런 것 같다.
가끔 사무실에 영업하시는 분들이 들어올 때가 있다. 카드를 만들라던가, 우유를 마시라던가, 자기네 식당에서 밥 시켜먹으라던가, 뭐 그런 사람들. 내 자리 한 켠에는 각종 카드사 팜플렛과 명함, 요구르트 회사 브로셔, 각종 음식집 메뉴판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모두 다 그 사람들이 놓고 간 거다. 내 자리는 사무실 가장 안 쪽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만 이야기를 하다 간다. "요즘 이것보다 혜택 좋은 카드 없어요." 라던가, "우리 집 짬뽕 진짜 맛있어요. 꼭 한 번 시켜먹어봐요." 라던가. 내 자리까지 오려면 내 앞에 네 명을 지나와야하는데, 그네들은 언제나 내 자리까지 스트레이트로 걸어오더라. 아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영업맨 특유의 눈으로 전투력이 가장 낮아보이는 사람을 찾는 거겠지. 그리고 전투력이 가장 약해보이는 나.
전투력이 가장 낮은 나이지만, 지금까지 그네들에게서 무언가를 구입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국집 사장님이 요구르트까지 줘가면서, "우리 집 탕수육 최고 맛있어요." 라고 해도, 평소 시켜먹던 중국집에서 시켜먹었고, 카드 회사에서 에버랜드 연간권이라던지, 교통비 할인 같은 혜택을 내세우면서 나를 유혹해도, "아, 정말 좋네요." 감탄만 했을 뿐, 카드를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외유내강! 내가 겉으로는 전투력이 낮아보일지언정, 실은 전투력이 꽤 높은 사람이거든.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내 자리에 와서, 녹즙 팩을 하나 씩 잘라주던 아주머니가 있다. 뭐 다른 말은 안했다. "어이쿠, 피곤해보이시네. 이거 한 잔 마시고 일해요." 하고 내 눈 앞에서 녹즙팩을 가위로 싹둑 잘라주면, 나는 또 선한 인상으로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빨대 꼽아 쪽쪽 잘 빨아 마셨다. "어이쿠, 잘 마시네. 이것도 한 번 드셔봐요." 하고, 또 싹둑 잘라주면, 나는 또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쪽쪽 잘 빨아 마셨다. 특별히 녹즙을 사 먹으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지만, 나는 일련의 행동이 내게 녹즙을 팔겠다는 의지임을 알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주는데, 나한테만 그렇게 녹즙을 줬거든. 분명 내가 쉬워보였던 거겠지! 절대 녹즙 같은 것 시켜먹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일 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와서 맨날 맨날 녹즙을 주는 거다 글쎄. 그렇게 올 때마다 주는 녹즙의 종류는 또 얼마나 많던지, 한 번 올 때마다 앉은 자리에서 녹즙을 네 팩, 다섯 팩 씩 꾸역 꾸역 받아먹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뭔가 달랐다. 매번 녹즙만 주고 "수고해요." 한 마디만 하고 슝- 가버리던 이 아주머니가, 갑자기 녹즙의 효능에 대해서 열렬히 설명하기 시작하는 거다. 아하, 지금까지는 내가 계속 업무 중이라 바빴는데, 딱 봐도 노는 것처럼 있으니 이렇게 본색을 들어내는군! 그래서 나도 지금껏 숨겨왔던 전투력을 끌어 모으고 있는데, 이 사람 나를 참 자세히도 관찰했더라. 내가 하루에 콜라를 한 병씩 마신다는 것도 알고 있어! 콜라를 끊고 녹즙을 마시면, 피부가 좋아질거라는 약점까지 공략을 했다. 피부 얘기만 나오면 약해지는 게 바로 나거든.. 콜라 마실 돈으로 녹즙을 마시라고. 몸도 건강해지고, 피부도 건강해지고.
평소 주변 사람들이 내가 콜라를 한 병씩 들이붓는 것에 대해서 한 소리씩 하면, 자랑스럽게 내뱉는 말이 있다. "육체적 건강도, 정신적 건강도 모두 중요한 거잖아요. 제가 우선 순위를 두고 챙기는 건강이 정신 건강일 뿐이에요." 그러면 다들 콜라 끊으라는 소리를 잇지 못하고 그만두는데. 이번에도 역시 나는 정신 건강이 더 중요해! 라고 방어해보려고 했는데, 앗, 앗, 하는 사이에 제대로 된 방어 한 번 못해보고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던 나. 나와의 전투에서 아주 손쉽게 승리를 거두고, 내 서명을 받아낸 계약서를 가방에 챙겨넣은 채 떠나는 아주머니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서 한 소리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자기만 공략하는 거야."
아냐.. 난 삼고초려에 당했을 뿐이라고... 라고 자위해보았지만, 알고 있다. 내가 호구인 것을. 그것도 한 눈에 봐도 그렇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나보다 어린 아이들의 맛있는 먹잇감이 된다던가,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내게 스트레이트로 와서 영업을 한다던가, 내게만 녹즙을 건낸다던가 하는 일련의 일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에잇, 녹즙 먹고 건강이나 챙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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